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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네가 좋아. 그래.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에스더 카터니까, 였으면 이 선에서 멈췄을 거야. 그런데, 너는. "
언젠가의 나를 향한 네 물음을, 네 시선을 다시 돌려받는다. 잊고 있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네가 눈물을 흘리면 나는… 나 역시 울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들이다. 어디선가……
" 내가 좋아하는 에스더 카터잖아. "
아─. 기억났다.
여전히 에녹 카터의─또다른 에스더 카터에 불과한 망상같은 존재였을지라도 이리 칭하는 수밖에 없었다.─ 탈을 벗겨내지 못한 나와 당시의 에스테반 아스트리드. 이 다음은 어땠더라.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닥을 적시는 눈물 방울들을 보며 깨닫는다. 사과,
" 미안. "
했던가.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튀어나오는 짧은 문장과, 항상 예고없이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마치 소나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스더 카터의 공간에는 먹구름이 진다. 나는 필사적으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지만 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많은 사람은 자주, 사건의 원인을 찾아 헤매고는 한다. 나는 한 편의 연극과 같은 장면을 지켜보며, 덩달아 터져나오기 직전의 울음을 내뱉기보다 그 원인을 찾아 하염없이 탓해본다.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이었으므로 의미없는 짓이었다.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 …미안. "
이러려던게…
…
…에스더 카터는 눈을 떴다.
품에 안긴 온기가 무색하게 에스더 카터는 어스름이 진 새벽녘에 잠에서 깼다. 제 애인인 에스테반 아스트리드가 아직 잠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자니 아침이 되기까지는 한참 먼 듯 했다. 묘하게 답답한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숨을 한 번 크게 몰아 쉬었다. 혹시라도 제가 꾼 것이 마냥 꿈이 아닌 건 아닐까, 에스테반의 얼굴을 엄지로 짧게 훑었다. 다행히 손 끝에 눈물자욱이 남는 일은 없다. 안도의 한숨을 마저 내뱉었다. 그 짧은 행동을 하면서도 당신이 깰까봐 조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금방 자세를 고쳐 그를 끌어 안는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잠에서는 깼지만 감정은 무릇 꿈 속을 헤매는 모양이다.
잠이 많은 자신이 에스테반보다 일찍 깨는 일은 흔치 않았다. 선천적인 이유로, 또는 후천적인 이유로 본인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당신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우린 누구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어느 사이보다 대척점에 있는 관계였다. 그래서 줄어들 리 없다고 짐작한 거리였는데… 예측이 무색하게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이렇게 껴안고 있는 만큼. 0이다. 이제와서 나는 놓을 생각도 없었고 당신 역시 놔 줄 생각 따위는 없을 것이다.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만큼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죄책감일까.
당신을 피해다녔던 나날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새삼스레 생각해 보자면 너를 거부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들만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나는 과하게 신중했고 너를 너무 사랑한 탓에 밀어내는 모순적인 상황의 연속.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해묵었을 너의 상처들이 아직 나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았다. 누군가 말하기엔 상처고 또 누가 느끼기엔 흔적일 수 있겠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당신이 수도없이 흘렸을 눈물만은 사실이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모습이고 네가 낼 답변도 안다. 상처가 아니었으며 후회하지 않으니 됐다. …와 같은 이야기들. 나는 다시 안도하겠지.
허나 나는 느낀다. 이 죄책감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가에 맺힌 눈물의 흔적이 당사자의 괜찮다는 한마디로 씻은 듯이 나을 리가 없다. 언뜻 품어 지워지지 않을 이 감정을 네가 알면 어쩐지 슬퍼할 것이 뻔하다. 그래, 숨기자. 비밀이다. 너를 위한. 느릿느릿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는다.
너는 미안하다고 하면 싫어할 거지? 그렇다면 대신 사랑한다고 하자. 거짓된 애정은 아니지만 약간의 사과를 첨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