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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의 하늘이 짙게 물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이면 옅고 따뜻한 색이었는데. 한참동안 말없이 창문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에스테반이 물었다. 에스더, 밖에 누가 있기라도 해? 응, 아니.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두자 보랏빛 눈동자에는 짙은 남색 대신 검은 제 연인이 담긴다. 많이 어두워졌다 싶어서. 답을 들은 에스테반이 옅게 웃는다.
항상 아침은 에스테반이 자신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끔 그가 저를 깨우는 것 보다 제 눈이 먼저 뜨일 때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누가 먼저이든지 매일 아침 에스테반 아스트리드와 에스더 카터의 시작은 서로였으니까. 그 하나면 충분했다.
아침이면 유난히 무거울 몸을 이끌고─때때로 일어나기 싫어, 하고 어리광을 부리면 에스테반은 웃으며 일어나야지. 하고 달랬다.─ 간단한 샤워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는다. 사용인들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나면 그제서야 하루의 시작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작은 실랑이의 시작이기도 했다.
" …나도 줘. "
" 안 돼. 쉬어. "
에스테반 아스트리드의 능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사무적인 일처리 뿐만아니라 거의 다방면에서. 그는 하나를 부탁하면 족히 열은 해내는 사람이었다. 열이 뭐야. 백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에스더 카터의 시선에서 보는 에스테반 아스트리드는 그랬다. 그의 어림짐작이 아님을 증명하듯이, 에스테반이 가주로 있을 당시의 아스트리드 가는 많은 분야에서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집안이었으니까. 뭐, 옛날 얘기다. 에스테반도 이런 이야기를 딱히 달가워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따져보자면… 분명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 한 20배 쯤 효율적이었다. 에스테반이 주장하는 부분이기도 했고. 물론 본인도 알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에스더가 에스테반에게 일을 주지 않는 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순전히 감정적인 고집이라는 뜻이다.
" 아니 그럼 나는 뭘 해…. "
에스테반이 툴툴거리며 반감을 표한다.
" 쉬면 되지. 책을 읽어도 되고. "
어조의 사이사이에 펜촉과 종이가 맞물리면서 사각거리는 추임새가 기웃거렸다. 몇 번의 대화 끝에 결국 에스테반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서운해하는 에스테반의 표정을 보고도 짐짓 모른 척 서류만 사각대다가 짧게 입을 맞춘다. 일종의 요청이자 사과. 이걸로 봐줘. 응?
아무리 비효율적인 고집이라고 해도 에스테반에게 제 일을 떠넘기는 일은 사절이었다. 단순한 이유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나도 안 힘들다니까? 옆에서 투덜대는 에스테반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반복되는 실랑이의 마지막 종이에 카터,의 이름으로 사인을 끝내면 그 이후로는 둘만의 시간이다. 금방 끝난다니까. 내가 도와줬으면 더 일찍 끝났잖아. 어색하게 웃으면서 서류를 정리한다.
시덥잖은 농담이나, 가벼운 정원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곳은 다시 서재다. 서재는 에스더 카터에게 가장 친숙하고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습성때문에도 그렇고, 언제나 네가 있었다.
똑똑.
" 부탁하신 차와 다과입니다. "
" 응. 들어와. "
책 한장한장에 서려있는 매마른 종이 특유의 건조함과 방금 막 우려낸 차의 향이 어우러지고 곧 서재를 메운다. 과하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샹들리에가 조용히 서재를 빛내면서 두 사람의 아래로는 짧은 그림자가 진다. 집어든 후로 시간이 꽤 지난 책은 이미 그 장을 넘어갈 생각조차 그만두었다. 신경질을 내듯 엉망으로 끼어있는 책의 어두운 자주색 가름끈을 바르게 잡아주고는 텁, 소리가 나게 닫는다.
우연히 바라본 창 밖의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이면 곧잘 따뜻한 색이곤 했는데. 시간이 흐른다. 오늘의 어두운 하늘은 내일의 밝은 하늘이 되고, 모레에는 또다시 어두운 하늘 아래서 별이 반짝이고 있겠지. 마치 상상도 못 할만큼 변해버린 너와 내 모습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하늘이 몇 번이고 바뀌어도 우리는 여기 있을테니까. 밤이 되면 서재의 샹들리에에 불빛이 들어오고 따뜻한 두 잔의 찻잔이 달칵 거리는 소리를 내듯이, 다 읽지 못한 책을 덮어버리고 그 행위의 연장마냥 서로의 입술을 짧게 덮어내듯이, 가을이 지나면 포근한 겨울이 오듯이, 너와 내가, 사랑하듯이.
첫 번째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