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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눙 2017. 8. 29. 05:08

 "이미 믿고 있어요. 많이."


 웃음을 터트리는 네 모습에 나도 자연스럽게 입가를 끌어올린다. 역시 웃는 편이 훨씬 낫잖아. 봐. 마저 작게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이 되어서야 에스테반은 자리를 떴다. 집 근처까지 배웅해줄까? 하고 물어도 한사코 마다하던 그의 뒷모습이 건물 뒤 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에스더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혼자 맞는 바람은 어느새 약간 스산하다. 하나보다는 둘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사실상 붙어있는 시간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고─물론 이전보다야 훨씬 많아졌지만─ 만나서도 그다지 친밀감 있는 표현을 하는 건 아니었다. 우선 둘 다 그럴만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당신이 익숙하다. 처음에는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했다. 내가 도망을 쳐서라도 그만은 피하고 싶었다.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알기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제 방의 문을 열고 가장 안쪽의 자리에 앉는다. 푹신함이 에스더 카터를 반긴다. 책상의 건너편, 혹여라도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 준비해둔 소파들에 시선이 머문다. …그랬던 거네. 허탈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리는 네가 희미하게 앉아있다.


 내가 너에게 내뱉은 말들은 너에게 얼마큼의 도움이 됐을까. 너는 정말 날 믿어주는 걸까. 믿어준다면 대체 왜. 나는 이미 몇 번이고 너를 떠났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는 건, 기다렸던 건. 입안이 썼다. 나처럼 못 믿을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당신을 향했던 웃음에는 아마 날 위한 자조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까. 이왕이면 몰랐으면 좋겠다. 

 …사실은 조금 겁이 나. 나는 항상 후회만 하던 사람이잖아. 내가 지금 네게 한 말이 또 후회로 번져나가지는 않을지, 내가 내 세계를, 네 믿음을 지킬 수 있을지. 너무 터무니없는 말만 내뱉어서 나중에는 결국…



 ……네가 날 원망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네가 날 믿어준다면 나는 어느 한 쪽이 떠나는 그날까지 완전한 척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내 형이 그랬던 것처럼. 몇 번이고 부딪힌 후에야 마주 본 눈을, 다시 피하게 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우리는 너무 많이 돌아왔어. 그러니까 똑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 


 그 앞에서 이런 말을 솔직하게 내뱉었더라면 아마,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렇잖아. 나는 쉴 새 없이 실패만 하던 사람이었어. 나는 그게 무서운 거야. 이번엔 어떤 결과로, 어떤 실패로 돌아올까 하는 것들. 


 에스테반. 너는 내가 끊임없이 적어내려온 이야기의 다음 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