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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었다. 벨란디 카우사를 졸업하기까지, 이 전쟁을 끝내기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과 시간을 건너 내가 있고,
" 나는 네가 좋아. 그래.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에스더 카터니까, "
네가 있다.
" …였으면 이 선에서 멈췄을거야. "
다만 나는, 네가 그 두 눈으로
" 내가 좋아하는 에스더 카터잖아. "
진실을 고하는 순간이 가장 두렵다.
내가 너에게 항상 상처를 입혔던 것처럼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나는 너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내 기록에 남을 너와의 두 번째 패턴이다. 나는 너에게 뭐야? 네가 건넨 말이 피할 여지를 주지 않고 꼬리를 물며 나를 쫓는다. 에스더 카터는 당신의 질문을 받아버린 이상 답변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몇 번이고 당면하는 상황이지만 역시나 익숙하지 않다. 아마, 평생이 지나도 익숙하지 않을 예정이다.
에스테반 아스트리드. 너는 나에게 뭐더라? 머릿속에서는 필사적으로 당신을 지칭하기 위한 단어를 찾는다. 동료? 친구? 아니면…
" 미안. "
이럴 때마다 도피의 수단으로 눈길을 바닥으로 돌리자면, 무서울 정도로 우연히, 무언가의 자국들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동안 바닥에 찍혔을 수많은 자국을 상상하면 내 심장에도 그 흔적이 남아버리는 것만 같다. 이미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꿋꿋이 뇌리에서 답을 찾으려 애를 쓰지만 결국에는 얼마인가의 공백이 지나고, 답변을 가장한 사과를 내놓는다.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더라. 영영 떠오르지 않겠지. 무언의 감일까. …아니, 아니다. 사실은, 이건.
" …미안. "
그래. 이건 도망이다. 너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내 소심한 도피. 너로부터 반 폭 정도의 뒷걸음질. 내가 그어버린 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한심한 자취.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정의해버리면 나는, 내 뒤에는, 도망칠 수 있을 만한 작은 틈마저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에스테반 아스트리드가 나 때문에 현실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상처를 입는 끔찍한 상상을 한다. 꾸준하고도 익숙해질 때까지. 그래야만 너에게 붙잡히지 않고도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상상의 끝에서 너는 결국 무너지고, 바닥에 주저앉고, 네가 흘린 눈물은 계곡이다. 발목만큼 잠긴 네 계곡이 무섭도록 시리다. 나는 항상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너에게, 붙잡히지 않고도, 이 관계를…
앞으로도 몇 번이고 반복할 이 새장 안에서, 나는 너라는 희망에 빠져버리지 않도록 항상 마음 한 켠에 절망을 담는다. 이게 내 최선이야. 모든 걸 보여줄 수는 없잖아. 네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 괜찮아. 라고 말하는 네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왜냐하면, 나, 정말. 아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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