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요, 같은 안부 인사나 농담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에스더가 한 손 검을 천천히 빼 드는 낌새가 보이면 에스테반도 이어 별말 없이 검집에 손을 댄다. 검을 맞대다 보면 그만으로도 대련하는 상대의 기분이나 상태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는 건 역시 과장이다. 어느 누군가는 일격만으로 상대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다고들 하는데 검에 인생 하나를 통째로 바치지 않고서야 이르지 못할 경지임을 안다. 다만 몇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주기적으로 한 사람과 검을 대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평소와 어느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집중하고 있는지,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에스테반 아스트리드와 대련을 할 때의 그는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 다칠 테니까. 비열한..
겨울에서 에스더는 앞으로 자신이 잊히리라는 사실, 아니 미래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우선 그는 평소에도 존재감이 그리 뚜렷한 사람이 아니니 저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예정이었고 두 번째로는 자신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많았지만 제 마음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더 카터'의 서사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면 곧 세상은 에스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마음속에서 내린 잠정적 결론이었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그는 마음속에서 꽃을 피우던 유일한 나무를 잘라내 종이를, 책을 만들었다. 나무를 베어내자 남은 색이라곤 잉크에서 묻어나온 검은색과 빛바랜 종이의 누런 흰색이 전부였다. 겨울의 시작이었다. 사람의 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행위는 습관이었다. '마음의 준비'로는 괜찮았을지 모르겠지만, 실컷 상상하던 결과를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면 그간의 준비가 무색하게 덜 울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즉, 효율적인 감정 소비는 아니라는 소리다. 계속되는 무의미한 감정 소비에 지치다 못해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마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세상에 무한한 자원이 없듯이 그의 눈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습격 이후 후유증으로 앓아누웠던 형이 결국 숨을 거둔 지 삼 개월하고 열흘쯤 지났을 때, 나오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며 깨달았다. 나는 이제 형을 위해 울 수조차 없겠구나. 속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났다. " 자? " 익숙한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뜬다. 긴 겨울이 끝나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 계절 내내 잠겼던 창문을 열어놓자니 햇..
객관적으로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같은 전장을 누비던 동료면서 검을 맞댄 적도 있었고, 몇 년 동안 돌아오는 생일에는 집안에서 보내왔더라며 디저트를 나눠 먹기도 했다. 당장 다음 날이면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에서 전쟁을 함께 겪어나가다 보면 그 전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을지라도 무언가의 호감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연인이 되기까지 치른 모든 순서와 선택들이 당연시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어딘가의 누구는 운명이라고 지칭할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실로 비논리적이고 황홀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모든 일을 이치로 만든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말해버리면 그 많은 시간이, 너와 내가 찾지 못했을 가치를 찾고 다른 이들은 공감할 수 없을..
*ㅅㅏ귀기전............다소두서업읍니다 지금안스면잊어버릴것같애요. 많이 좋아했어. 아무도 없는 서재 안에서 에스더 카터가 읊조렸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막연한 고백은 선명한 과거형이다. 사용인이 내온 차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책장은 143쪽에서 넘어가기를 포기한지 오래다. 며칠이나 됐더라. 하루가 멀다하고 저택에 들리던 에스테반이 발길을 끊었다. 원래 이 시간이면 항상 네가 같이 앉아있었는데.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여과없이 드러낸다. 제 표정을 볼 이도 지금 이 공간에는 없으니 아무렴 어떤가. 빈 자리가 유독 쓸쓸하다.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말을 나누었던 그 때,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고 대화가 당신을 찔렀다. ..
종전 이후, 에스더 카터라는 이름은 어느 집안에서는 거의 금기시됐다. 내쳐지는 다섯 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는 만큼이나 이유마저 불투명했다. 실수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입에 담았던 사용인이 결국 얼마 전 내쫓기고 말았다는 형체 없는 괴담이 가문 내에서 잠깐 돌았다가 가라앉았을 만큼 저택의 주인은 그 다섯 글자에 굉장히 예민하게 굴었다. 누군가를 지칭하는 명사에 이리 민감한 경우는 보통 두 가지 경우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거나, 증오하는 사람의 이름이거나. 어쩌면 사랑과 증오는 한 끗 차이인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을 " 정신 안 차리니? " " 아, 아! 죄송합니다! " 하다가 하마터면 어린 사용인이 찻잔을 깨트릴 뻔했다. 조금 산만한 부엌의 풍경. 점심시간이라기엔 늦었고, 저녁 시간이라기..
전쟁이 끝나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누군가는 계속 총을 들었고, 어느 누군가는 이제 검을 쥘 일이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악기를 켜게도 됐다. 시간은 신기한 힘을 가졌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들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어느 사람에게는 상처를 회복하는 계기가, 또 다른 이에게는 상처를 덧나게 하는 계기가. 아무튼, 시간은 좀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고 또 붙잡을 수도 없는 모습이 딱 옛말 그대로였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당연히 전쟁이 끝난 어느 나라의 부유한 가주와 그의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였을 눈물과 멈춘 시간을 딛고 마주했던 순간을 종종 떠올린다.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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