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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눙 2017. 12. 17. 10:23

 





전쟁이 끝나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누군가는 계속 총을 들었고, 어느 누군가는 이제 검을 쥘 일이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악기를 켜게도 됐다.

 시간은 신기한 힘을 가졌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들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어느 사람에게는 상처를 회복하는 계기가, 또 다른 이에게는 상처를 덧나게 하는 계기가.

 아무튼, 시간은 좀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고 또 붙잡을 수도 없는 모습이 딱 옛말 그대로였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당연히 전쟁이 끝난 어느 나라의 부유한 가주와 그의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였을 눈물과 멈춘 시간을 딛고 마주했던 순간을 종종 떠올린다. 붙잡힐 리 없었던 것들이 손에 잡혔고, 놓을 수 없었던 것들을 놓았다. …시간은 신기한 힘을 가졌다.


 그 복잡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검을 놓았다. 검 대신 둘은 커피잔을 쥐고, 펜을 쥐었다. 때로는 무거운 책을 든다. 혼자인 시간보다 공유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간 함께하지 못했던 수많은 과거의 공백을 모두 메워버리겠다는 듯. 물론 모든 일이 완벽하리라는 법은 없어서, 이런 시도에도 미처 채우지 못한 시간이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채워지지 않을만한 깊은 공백은 굳이 시간으로 묻으려고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웃음으로 덮어내면 되었다. 그래도 비어있는 여백은? 그냥 내버려 두자. 어떠한 공허도 여백도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에는 문제조차 되지 않는 부분들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과거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똑똑. 사용인의 작은 노크 소리가 서재를 울린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사람이 각각 좋아하는 차와 다과를 내오면 둘은 항상 얼마 지나지 않아 찻잔부터 손에 쥐었다. 검을 쥐던 손인지라 여기저기 남은 흔적들은 부정할 수 없지만 뭐 어떤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서로를 공유하고 있는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달칵 소리를 내며 내려놓는다. 그럼 다음에는 책장을 한 번 넘길 차례다. 몇 번 행동을 반복하다가 얼핏 서로의 행동이 닮았음을 깨닫는다. 아, 우리에게도 더는 달라지기 어려울 만큼 다르고 멀어지기 힘들만큼 멀 때가 있었는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에스더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럼, 책에 집중하던 에스테반이 에스더를 바라보는 순서는 대본의 지문만큼 예정대로다. 이윽고 에스더도 에스테반을 쳐다보면 눈길이 닿는다. 자연스러워진 행동에 또다시 그가 알아차린다. 이 모든 행동은 서로를 사랑하기에 자연스럽다.


 놀라울 정도로 닮은 행동과 자연스러운 모습.

 그래. 사랑은 사실 서로가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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