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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Tempus fugit. amor manet.

여눙 2018. 2. 26. 05:55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행위는 습관이었다. '마음의 준비'로는 괜찮았을지 모르겠지만, 실컷 상상하던 결과를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면 그간의 준비가 무색하게 덜 울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즉, 효율적인 감정 소비는 아니라는 소리다. 계속되는 무의미한 감정 소비에 지치다 못해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마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세상에 무한한 자원이 없듯이 그의 눈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습격 이후 후유증으로 앓아누웠던 형이 결국 숨을 거둔 지 삼 개월하고 열흘쯤 지났을 때, 나오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며 깨달았다. 나는 이제 형을 위해 울 수조차 없겠구나. 속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났다.


 " 자? "


 익숙한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뜬다. 긴 겨울이 끝나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 계절 내내 잠겼던 창문을 열어놓자니 햇볕이 공기를 따르듯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차, 자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누가 봐도 의자에 기대 자다 만 모습으로 에스테반을 부른다. 왜?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에스테반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의 할당량을 늘려달라, 고 은근슬쩍 요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아냐, 많이 좋아해. "


 그러고 보면 그는 살면서 요 몇 달 사이만큼 제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했던 날이 없었다.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그가 감정에 대해 굳이 서술하지 않는 이유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과 같이 최소한의 방어기제 중 하나였다. 감정을 언어로 정의하면 그 순간부터는 꼼짝없이 정의한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휩쓸린 감정 안에서 멀쩡히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한 번쯤은 먹혀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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