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하드커버를 소리 나게 닫았다. 평소 조용한 에스더의 말투나 행동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에스테반이 자연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한동안 제 무릎 위에 책과 함께 머무르던 손이 느릿하게 작은 탁자 위를 향한다. 책의 중반부에 끼인 가름 끈이 탁자에 닿는다. 양장본의 표지가 별다른 소리 없이 놓였다. 에스더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털로 만들어진 그의 슬리퍼가 바닥에 깔린 카펫을 약하게 긁었고 카펫과 털실이 쓸리는 소리뿐이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긴 에스테반이 열어둔 말끔한 표지의 책장은 이미 넘어갈 생각을 그만둔 지 오래. 눈길의 끝이 에스더를 좇는 모습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에스테반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책을 덮는다. 말하지 않아도, 시계를 보지 않아도, 사용인의 재촉 어린 노크가 서재를 울리지..
" 너 " 수천 번을 어림짐작하고 떠올렸더라도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향해서 입 밖으로 내뱉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진심. " 날 잊어줄 생각 같은 거, 사실은 없지? " 이건 감이다. 본디 사람이란 전부 비슷하지만 같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정도의 미묘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종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큰바람을 부르고 생각 없이 굴렸던 눈덩이 하나가 엄청나게 불어나듯이 인간들의 그 자잘한 차이점에서 일어나는 마찰과 충돌과 불협화음은 아차 할 때쯤이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종류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차이점은 예를 들면 그런 것들이었다. 에스더 카터는 자신을 에녹 카터라고 암시하고, 당신은 에녹 카터가 에스더 카터임을 직시한다. 이런 사소한 틈은 서로 인지하고 있을지언정 입 밖으로, 행동으..
아스 루시모프 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빠른 손놀림과 함께 한 장 한 장 얇아져가던 복잡한 서류들이 돌연 움직임을 멈춘다. …모실까요. 그 정지화면을 놓치지 않은 사용인이 묻는다. " 그래. " 긍정의 의미인데도 평소보다 힘이 실린 답변이다. 항상 그렇지 뭐. 사용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 방을 나갔다. 서재에는 카터가 혼자 남는다. " 저번에 의뢰해주셨던 건입니다. " 차분한 말투가 서로 오고간다. 검은 머리카락의 아스 루시모프. 자신이 원하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택한 옛 ……동생의 …동료. 그가 건넨 서류를 점잖게 훑어보지만 왜인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읽히지 않는 수치와 문자들을 확인한 척 다시 서류 봉투에 가지런히 집어넣고, 다음 서류 봉투를 집어든다. 그 건은…. 이번에는 당신이 덧..
에스더 카터는 책을 쓴다. 당신이, 네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쓰는 조금 긴, 장편의 소설. 주인공은 너와 나, 두 사람이다. 이 책의 흐름에는 몇 가지 패턴이 존재한다. 첫째, " …일어났어? " " ……좀 더 잘래. " 나는 항상 상처입히고 너는 늘 상처입는다. LAST. " 주말이라고는 해도… 일어날 시간 한참 지났는걸. " " ……. " 시침이 숫자 10을 반쯤 지나가고 있었다. 사뭇 모른 척, 눈을 뜨고 싶지 않아서 꾹, 감고만 있자 네가 흔들어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그래도 많이 봐줬나. 마지못해 눈만 뜬다. 어차피 일어나야 하잖아. 잠이 많은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에스테반의 목소리다. 한결같은 너의 … " 에스더. " 네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막연한 감정에 휩싸이고 ..
=""> 창문 너머의 하늘이 짙게 물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이면 옅고 따뜻한 색이었는데. 한참동안 말없이 창문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에스테반이 물었다. 에스더, 밖에 누가 있기라도 해? 응, 아니.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두자 보랏빛 눈동자에는 짙은 남색 대신 검은 제 연인이 담긴다. 많이 어두워졌다 싶어서. 답을 들은 에스테반이 옅게 웃는다. 항상 아침은 에스테반이 자신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끔 그가 저를 깨우는 것 보다 제 눈이 먼저 뜨일 때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누가 먼저이든지 매일 아침 에스테반 아스트리드와 에스더 카터의 시작은 서로였으니까. 그 하나면 충분했다. 아침이면 유난히 무거울 몸을 이끌고─때때로 일어나기 싫어, 하고 어리광을 부리면 에스테반은 웃으며 일어나야..
에스더 카터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에 썩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르침을 받는 상대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처음 만났을 때는 본론보다 일상적인 주제를 이끌어 긴장된 공기를 푼다던지, 상대의 부족한 점은 에둘러 지칭해 엄격한 분위기를 지양한다던지. 그러니까… 사실은 가르침 이전에 남을 대하는 것에 서툴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한 타입이라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에스테반을 '가르치는 일' 하나는 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애초에 맡은 일은 최대한 해내는 사람이니. 특히 정이 섞인 일이라면.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그는 칼을 한 번 휘두르는 일이 없었다. 정해진 약속 장소에서 에스테반을 만나고,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검집에 도로 꽂아 넣은 ..
" ……나는 네가 좋아. 그래.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에스더 카터니까, 였으면 이 선에서 멈췄을 거야. 그런데, 너는. " 언젠가의 나를 향한 네 물음을, 네 시선을 다시 돌려받는다. 잊고 있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네가 눈물을 흘리면 나는… 나 역시 울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들이다. 어디선가…… " 내가 좋아하는 에스더 카터잖아. " 아─. 기억났다. 여전히 에녹 카터의─또다른 에스더 카터에 불과한 망상같은 존재였을지라도 이리 칭하는 수밖에 없었다.─ 탈을 벗겨내지 못한 나와 당시의 에스테반 아스트리드. 이 다음은 어땠더라.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닥을 적시는 눈물 방울들을 보며 깨닫는다. 사과, " 미안. " 했던가.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튀어나오는..
약간 초조해 보이는 너, 어느새 다시 잡혀있는 나. 역시 조금만 물러나자. 하고 마음먹었던 게 무색하게 거리는 거듭 원점이다. 안녕, 에스더. 보고 싶었어. 나는 문득 네 말끝에 무언가가 서려 있는 것을 깨닫는다. 두려움? 안심? 아니다. 이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정체는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도 언뜻 알아차린다. 상관없다. 내 이기적인 욕심과는 같을 리 없는…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연이어 네 입에서 나오는 말에 담긴 건 그래, 온전히 걱정뿐이다. 내가 섣불렀구나. 착각했다. 다른 무언가가 서리기는 무슨. 당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드디어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다. 같을 리가 없지. 네 심정을 함부로 추측해버린 실수에 대해 나는..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