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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눙 2017. 10. 10. 03:01







 미쳤구나 진짜. 잠에서 깬 직후의 첫 감상. 에스테반이 날 불렀던가. 깨자마자 흐릿해진 기억에 남는 것은 감정뿐이다. 막 달리다 만 사람처럼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짧게 심호흡을 한다. 이마를 짚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짧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셔야 할 시간… 어머.

 눈이 마주치자 사용인이 티 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무슨 일 있으세요? 일어나 계셨네요. "


 있었지. 아마. 불확실한 대답을 삼키고 고개만 젓는다. 이불을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용인의 손길이 닿았다.

 사용인이 놀라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는 영역이라 특별히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녀의 주인은 항상 아침에 몇 번이고 방을 들락날락해야 겨우 일어날까 말까, 할 정도로 잠이 많은 사람이었다. 잠귀도 어두운 탓에 매번 그의 아침을 깨우는 사용인들은 곤욕을 치렀다. 그런 당사자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기도 전에 일어나 있었다니. 가히 놀랄만하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타인의 도움을 받아 와이셔츠의 두 번째 단추를 채우며 속으로 이해한다. 심장이 아직도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혹여라도 평소와 다르게 뛰는 심장을 들킬까 걱정한다. 다행히 사용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태연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손길이 떨어졌다.

 내려가셔서 아침 드세요. 사용인이 구겨진 이불의 주름을 펴내며 말했다. 응. 알았어. 짧게 대답한다.


 잠을 영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꿈이란 이리도 피곤한 것들이었나. 뇌리에는 아직도 그가 옅게 남아있다. 꿈은 좀처럼 수면 위로 명확하게 떠 오를 생각도 없었으면서 완벽하게 가라앉을 마음도 없어 보였다.

 거슬려. 밥을 먹는 내내 에스더 카터는 어쩐지 덜 풀어진 표정이었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생하는 건 저 자신이었다. 왜 이러지. 다음 날로 밀려날 일의 양을 생각하며 책상에 약하게 머리를 박는다.

 최근 들어 일을 열심히 하기는 했다. 아니, 최근은 아니지. 수많은 서류의 서명 란에 '에녹 카터'를 적어내기 시작한 순간부터다. 리바운드? 일을 너무 열심히 한 충격이 뒤늦게 되돌아오는 걸까. 의미 없는 가설을 세우며 눈을 감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며 짧게 춤을 춘다. 내 기억이 맞았다면 이렇게 바람이 불 때는 분명 그 검은 머리카락이… 


 " …터, "


 커튼처럼 바람에…


 " 카터! "

 " …어? "


 번쩍 눈을 뜨자마자 시야가 돌아온다. 무거운 고개를 억지로 들자 사용인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상황을 파악하기에 앞서 그가 먼저 설명을.


 "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깨워 드리기 전까지 내리 주무셨습니다. "


 얼마나? 두 세시간 정도요. 아마.

 진짜 미친 모양이다. 덕분에 온몸이 뻐근해 짧게 스트레칭을 하자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 그러고 보니 손님 분이 오셨는데요. 에스테반 님이요. "


 몸뚱이가 이름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멈춘다. 모실까요? 평소라면 묻지 않았을 질문을 덧붙이는 걸 알아챈다. 사용인으로서 오랜 시간을 보낸 당신이 보기에도 내 상태가 영 별로였던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응, 하고 답했을 목소리가 걱정에 보답하듯이 나오질 않았다.

 분명 일상이다. 일이 끝나면 항상 얼추 비슷한 시간에 네가 찾아오고 나는 서재에서 너를 맞이한다. 별 것 아닌 농담이나 일과를 물으며 읽다 만, 혹은 새로 읽을 책을 책장에서 뽑아든 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하드 커버의 첫 페이지를 연다. 차나 과자는 선택사항. 이제는 전부 내 일상이다. 네 일상이기도 할까. 조용히 보기 좋게 쓰여진 활자를 훑다가 입을 열기도 하고 때로는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는 항상 자연스럽게 너의 머리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치 보듯 검은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가 책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가. 아쉬움을 삼키고 결국 검은 머리칼 대신 매만지는 가름 끈.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면 나도 책을 덮고 자리를 뜬다.

 이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잘 가, 내일 봐. 


 아, 어제도 분명 내일 봐. 하고 헤어졌는데. 잠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꿈에 나왔다는 건, 그래. 애써 무시했지만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치만 어떻게 좁혀온 거리인데?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아쉽더라도 여기서 정말 그만둬야 한다. 나는 역시 거리를… 널…


 " …그만두자. "

 " 네? "

 " ……. "


 무얼…? 저한테 한 말인 줄 아는지 사용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눈 앞의 물음을 뒤로하고 끝내 결정한다. 아냐. 나 아파서 오늘은 안된다고 해줘. 여전히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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