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으라고? 에스더 카터는 그 한마디에 고개를 들었다. 이 길고 긴 밤의 공기를 홀로 들이쉬며 일부러 환상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던 노력이 무색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뱉지 못한 말들이 에스테반 아스트리드의 모습처럼 입안에서 흐트러졌다. 환상이 아니야? 너는 왜, 왜 또. 왜…
희무끄레한 형체의 에스테반을 보면서 에스더는 도저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만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갓난아기마냥 눈물만으로 제 답답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을 뿐.
에스더 카터라는 사람은 본래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이다. 선천적인 감정의 결여라기보다는, 오랜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후천적인 부류의 것이었다. 차마 빈말로라도 짧다고는 할 수 없을 히어로 활동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감정을 죽이는, 방법. 그 말은 곧 눈물을 쉬이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유지와 보수를 게을리 한 댐이 터지듯 그간 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결국 에스테반을 통해 되새겨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오늘로만, 이 밤으로만 벌써 두 번째다. 둘쨋번의 울음은 처음보다 더 비참했고, 비통했다. 애써서 내보냈던 말들마저 제대로 따옴표를 붙이지 못하고 계속계속 새된 소리로 갈라진다. 에스더는 결국 에스테반의 눈을 잠깐 피하기로 한다.
" 가지 말아,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건 너면서, 또. "
넌 또… 울음 때문에 호흡이 자꾸만 막히는 바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는다. 대화에 한 템포의 간격이 생긴다.
" 넌 왜 내 부탁은, 하나도 안 들어줘? 에스테반, 응? 왜… 왜? 내가 다 잘못했어. 너는 사과하지 말라고, 나한테, 그랬, "
그리고 다시 호흡을 위한 한 템포. 몇 시간 전부터의 에스테반 아스트리드는 이제 이렇게 숨을 쉬기 위해 울면서 말을 끊을 필요도 없겠구나. 문득 미친 생각에 에스더는 더욱 서러워졌다. 표정이 엉망이 된다.
" 그랬는데…. 지금 내가 사과하는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 네가 가면 나는 어떻게 해 ? 이제 ? 앞으로 지새울 수많은 밤들을 나는, 이제 혼자서, 버틸 자신이 없어. 그동안은 그 긴 밤 사이에서도 그리울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
그런데 이제…. 말이 뚝 끊긴다. 에스더는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바닥으로 하강한다. 바닥마저 제 심정과 같이 우는 꼴이 된다. 여전히 에스테반을 바라볼 용기는 없었다.
" 그렇게 말하고 가면 끝이야? 나 죽고 싶어, 에스테반. 나 진짜 이대로는, 나… 아스트리드……. "
그래, 이리 울고 있는 이유는 모두 미련 때문이다. 세상 누구보다도 에스테반을 원망하는 위치였다가 말 몇 마디만에 애원으로, 절망으로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꾼다. 에스테반의 모습마저 일정하지 않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에스더 카터가 흘리고 있는 눈물 뿐이다.
눈물 뿐?
" 나, 너 사랑한단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이렇게 보내고도 나, 나…… "